“참된 생명을 취하라” (딤전 6:19) 정말 매력적인 문구입니다. 그 진실을 뼛속 깊숙이 느낄 수는 있지만,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 그런 문구죠. “참된 생명” (진정으로 삶다운 삶)이란 무엇입니까?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첫 번째 편지의 끝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참된 생명을 취하라”는 권고가 문맥상으로는 에베소 교회안에 재정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을 향한 내용이지만 그 진술은 교회 공동체 안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에게 “참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바울은 편지의 이 부분에서 예수님을 여러가지 “궁극적인” 언어로 묘사했습니다: 경륜하신 왕의 왕, 주의 주… 유일하게 영존하시고 우리 상상이상의 위대하심의 영광으로 충만하신… 모든 명예와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분…
예수가 그러한 궁극이라면 왜 우리는 여기 지상에서 나름대로의 궁극을 이루어 보려는 부질없는 애를 쓰는 걸까요? 우리 인간이 궁극을 성취해 보려는 길을 시작할 때, 대부분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궁극”과 “생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가장 흔히 우리의 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재산이나 소유… 또는 자녀를 낳거나… 특정 지위를 추구하거나… 직업적 성공을 위해 경쟁하는… 다른 사람들이 질투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에게 힘이나 가치 또는 목적에 대한 거짓되고 덧없는 (순간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는) 느낌을 주는 것들 입니다.
누군가가 “고상한 삶” 또는 “좋은 삶”을 원한다고 말할 때 그들이 오늘 성경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대한 그들의 동기에서 예수가 궁극적인 위치를 차지할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 디모데가 에베소에 있었고 바울이 그곳을 향해 편지를 쓴 이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짓 교사들은 돈에 대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의 교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 방식 목표도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재정적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지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고, 아마도 사람들에게 “지혜”를 전수하는 명목으로 돈을 받았을 확률이 큽니다. (바울은 사역자들이 그들의 일이나 사역에 대해 보수를 받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가 반대한 것은 이 거짓 교사들의 이유와 방법 둘 다 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거짓 교사들이 교회 공동체의 젊은 과부들을 이용하여 그들의 더러운 일을 하도록 했다고 밝힙니다. 공동체의 불우하고 취약한 지체들을 악용했던 것입니다. 이 여성들이 현재 상황에서 충실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그들이 세상에서 존귀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가도록 돕는 대신에, 거짓 교사들은 그들을 이중으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론 가난한 과부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나쁜 아이디어와 정보로 돈을 부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여성들이 집집을 방문하고 험담을 나눔으로 도시 안에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자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쁜 교리가 퍼지는 것에 대해 화가 난 것만큼이나 탐욕이 교회에 그렇게 깊이 자리잡고 있음을 우려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재정적 능력과 성공을 하나님의 기쁨과 그들의 승인에 연결하는 것을 포함하여 (따라서 바울과 디모데를 훼손하는) 참 진리를 왜곡하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번영 복음 (prosperity gospel)–오늘날 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특정 교리와 생활 방식—의 또 다른 형태였을까요?
한 번은 의심스러운 관행으로 대중의 관심과 조사를 받게 된 매우 유명한 사업가에 대해 가족들과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매주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사촌 중 한 명이 “하지만 그는 경건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디모데가 이 다른 교사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들었을까요?
우리 앞에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장난감이 매달려 있을 때 하나님의 진리를 잊어버리기란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돈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리가 그로부터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시각을 가리고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을 왜곡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전체에서 우리는 불의한 자도 의인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고 땅의 재물을 소유할 가능성이 있음을 상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특별한 것을 의미하기를 원합니다–곧 우리가 그것을 얻었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우리가 그것을 이루었다고 또는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입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순종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린 보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는 것이라고.
그러나 진정한 진실은 풍요함이나 풍성함이 단순히 하나님 속성의 일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어 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함에서 오는 만족은 이익을 위해 걱정하거나 억지로 밀어부치지 않고 “참된 생명”의 실상으로 우리를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그 어떤 거짓말도 줄 수 없는 선물 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경건조차도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된 삶의 최종 결과가 아니라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성경은 부(富)가 궁극적인 목표이자 척도가 된 사람들에 대해 암울한 그림을 그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그렇게 하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탐욕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무저갱으로 점점 더 빠져드는 길, 즉 우리가 유혹 (부정한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얻는 것을 의미함)에 굴복할 때 우리 자신을 설정하는 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계속 굴복할 때 그 길로 더 내 치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탐욕에 대해 경고하시는 위험은 그것이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궁극적인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보다 재물과 재물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다른 길은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경건에 자신을 드리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디자인 심지어는 성육신한 모범을 모델로 한 삶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부자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 누구나 “참된 생명”을 취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권고는 특히 에베소(그리고 오늘날)의 사람들 가운데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람들을 향합니다. 서구 교회에서는 우리 대부분이 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건은 어떤 모습입니까? (남을 위해) 선행을 하고, 선을 행함에 풍성하고 (남을 위해), 관대함과 나눔을 기꺼이 하기로 평판이 좋은 그런 모습일 것 입니다. 여러 관계들 가운데 풍성한 축복과 궁극적인 하나님의 영을 충만히 드러내는 삶, 필요에 따라 희생적으로 나누며 살고, 만족을 아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복음서에서 가르치셨듯이 이 땅의 모든 물질은 덧없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향하여 부요하게 살면 참된 보화가 하늘에 쌓인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진정한 경건은 모든 사람이 필요한 것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을 갖게 될 미래의 현실을 오늘 우리 현실의 부분으로 구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진리에 고착하고 말과 행실로 믿음을 지키며 우리의 영광이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길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고한 것처럼, “참된 생명” (진정으로 삶다운 삶)은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지배 아래 놓고, 그들을 이용하고,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의 지위를 향상시키려고 하는 모든 추구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참된 생명”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온 세상이 볼 수 있도록 지금 영생을 붙잡고 삶으로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이솝 우화에는 탐욕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쥐에 관한 이야기는 바울이 탐욕을 멸망의 길로 묘사한 것과 잘 일치합니다. 한 바구니에 옥수수가 가득 찬 것을 본 배고픈 생쥐가 있었습니다. 옥수수는 너무 유혹적이었고 생쥐는 그것을 정말로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들어갈 길을 찾기 위해 바구니에 갔고, 바구니 틈 사이로 겨우 끼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생쥐는 먹고 먹었고 그의 뱃살은 늘고 커졌습니다.
배가 너무 불러서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 후, 생쥐는 바구니에 들어갈 때 사용했던 틈에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들어가는 것은 그의 머리뿐이었습니다. 생쥐는 많은 옥수수를 먹어서 배도 아프고 바구니에서 나오지 못할까 몹시 걱정되어 신음하며 바구니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족제비가 와서 일어난 일을 보고 말했습니다. “너 스스로 갇히게 되었구나. 뱃살이 줄어들 때까지 거기 있어야겠네. 아마 내일이면 나갈 수 있을 거야.” 다음 날 아침, 생쥐는 밖으로 나갈까 생각했지만 옥수수를 더 먹기로 했습니다. “먼저 옥수수 좀 더 먹고 내일 언제든 나가면 되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결국 다시 옥수수를 너무 많이 먹고 바구니 안에 복통을 안고 누워 있는데 고양이가 와서 바구니에 쥐가 갇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욕심 많은 생쥐의 최후였습니다.
John Wesley는 돈의 사용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는 세 가지 주요 요점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최선을 다해 버십시요. 최선을 다해 저축하십시요. 최선을 다해 베푸십시요.” 그러나 이러한 진리가 은밀한 목적으로 왜곡되기 쉽기 때문에 Wesley의 부연 설명은 주요 요점만큼 중요합니다. 최선 다해 돈을 벌되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균형 잡힌 삶을 가능하게 하는 명예로운 직업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또는 우리의 부양 가족)에게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지 않음으로써 세상의 쾌락에 돈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저축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축함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매우 실용적인 조언을 합니다. “만일 당신 자신이나 가족에게 지출할 비용에 대해 언제든지 의심이 생긴다면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침착하고 진지하게 물어보세요.
- 이것을 소비하면서 나는 내 가치대로 행동하고 있는가? 나는 여기에서 소유주가 아니라 주님의 청지기로서 행동하고 있는가?
- 나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이렇게 하고 있는가? 어떤 성경에서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는가?
- 이 행위, 이 비용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있는가?
- 내가 바로 이 일로 의인이 부활할 때에 상을 받을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있는가?
머리속에 생기는 의심을 없애기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생각으로 당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한 분명한 빛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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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전 6:6-19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