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7절이 예수님이 여행을 시작했다는 자연스러운 전환을 알리고 있지만, 저는 13절-16절이 이번 주 설교를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본문에 포함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렇게 하는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 나오는 ‘본문의 요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모로 보나, (지난 주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했던 시험과 달리),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질문은 진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가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계명을 지켜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켰다”(kept)라는 말에는 “수호했다”(guarded)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가 율법을 문자적으로 신실하고 신중하게 지켜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사람의 질문을 호의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숨겨진 동기를 파헤치는 대신, 그를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신중하게 여기셨고, 뿐만 아니라 율법이 문자적 의미를 넘어 그 핵심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도전을 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대다수의 우리들을 위해 그 사람 안에 있는 참된 것을 보십니다. 우리들에게 자신의 삶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릴 의지가 부족하다는 그 사실 말입니다(로마서 12:1-2)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정체성과 지위를 얻게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따를 것을 권유하시면서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때 그 사람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 사람만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종교적 전통에서는, (제가 일부러 ‘전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가 축복에 대한 언약의 증거라는 생각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 부를 가지게 하신다… 나의 소유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나의 부는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표시다… 이런 생각 말입니다. 주의 하십시오. 오늘날 우리도 이 함정에 쉽게 빠지곤 합니다. “부자가 구원받지 못하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했던 제자들의 질문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실망 속에 부자 되는 것과 하나님의 호의를 받은 것이 동일하다는 가정, 곧 그들이 영원이 주어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가진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자원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부자와 어린 아이들의 주요 차이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영접하라고 하시고 닮아가라고 하신 그 어린 아이들 말입니다. 제가 어린 아이들에 대해 지적했던 것, 곧 그들은 지위도 없고, 자신의 안녕과 보호, 그리고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여러분의 시간, 재능, 보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그 분에게 맡기고, 그 분의 계명이 드러내는 계명과 그 계명의 정신에 순종하고, 산 제물이 되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Graham Kendrick가 부른 “Knowing You”(‘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로 번역 되어 있음. 역자 주)라는 찬양은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됩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가지려 했던 세상 일들, 이젠 모두 다 해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다 버리네”(기존 가사 인용. 역자 주) 이 노래가 본문에 나오는 그 부자의 노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보물을 원했지만, 이 땅의 보물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의미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소유에서 멀어진 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몇 단락 앞에 있는 마가복음 9:42-50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잘라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 본문이 그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의 “많은 소유”가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것을 잘라내면 충분히 큰 보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듣고 싶었던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하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실제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부자가 떠난 후, 예수님이 사랑의 시선으로 제자들을 바라 보셨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세속적인 신분 게임의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에게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반복하고 강조하셔야 했습니다. 이 땅에서 부에 지나치게 얽매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 말입니다. 실제로, 낙타가 마술처럼 바늘 귀를 통과할 가능성이 그보다 더 높을 정도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의 소유와 여러분의 지위가 여러분의 신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 밖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의 함의를 깨닫게 될 때, 예수님이 성공과 지위에 대한 인간의 기대를 어떻게 뒤집는지 알게 됩니다.
(비록 잘못된 생각이었지만!) 그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베드로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사역에 의해, 제자들은 자율성을 포기하고, 랍비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받기 위해 그에게 복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삶의 목적과 지침을 제시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른”이셨습니다-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린아이들이라 부르는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부는 소유할 수도 있지만 소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느슨하게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이나 하나님이 청지기에게 맡기신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또 단순히 안과 밖, 축복과 저주의 표식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James Bryan Smith는 ‘하나님 나라 경제학’이라는 용어를 통해, 신약 성경의 모델이 증명하듯,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의 필요를 서로를 통해 충족시키려고 의도하신 방식에 대해 말합니다. 사도행전에서만 아니라, 서신서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소유를 먼 곳에 있는 사람들 포함, 모든 사람의 소유인 것처럼 나누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는 제자도의 통합된 삶이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주인으로 여긴다는 증거입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정보에 대해 ‘예화 아이디어’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요점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소위 샌드위치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13절-16절에서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 나라”를 반복적으로 언급하셨고(그래서 이번 주에 이 부분을 다시 읽어보라고 권유한 것입니다), 23절-25절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셨습니다. 샌드위치의 빵에 해당하는 부분이 이 반복(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라에 속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고, 가운데 부분이 예수님과 부자의 만남입니다. 이 부분에서 빵의 의미가 생생한 상황 속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 땅에서 안정과 번영을 누리는 사람이 어린아이의 자세, 즉 자신의 생명과 안녕과 장래를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주는 태도를 취하기 어렵지만, 제자도의 삶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예화 아이디어
여러분은 아마 St. Francis of Assisi와 그의 헌신, 곧 그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려 했던 것에 대해 생각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는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는 하나님의 초대에 대해 (그의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았던 행동으로) 그 부자와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Francis의 순종을 강조하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외투를 늘 기부했던 것에 대해 상관으로부터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그가 외투가 필요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에게 “나는 당신에게 이 겉옷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이 나에게서 이것을 가져간다면..”이라고 말했습니다.
Francis의 경우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소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또는 적어도, 우리가 비슷하게 (극단적인!) 희생을 고려할 때 변명거리로 사용 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 안에 중요한 부르심이 나오지만, 자신의 삶, 기술, 재산, 자원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방법에 대한 ‘더 부드러운’ 예들도 있습니다.
저는 Parker Palmer가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한 퀘이커의 그룹 분별을 경험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회원이 자신들의 필요를 작지만, 헌신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인 ‘명확성 위원회’(Clearness Committee)에 가지고 옵니다. (위원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그 사람이 명확성을 얻도록 돕기 위해 그 사람 주변에 모입니다. 퀘이커들은 1660년대부터 이렇게 해왔습니다…) 위원들은 분별이 필요한 그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여러 질문들을 던집니다.
이런 그룹 분별 과정과 더불어 영성지도는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태도를 위한 개인적인 헌신의 방법입니다. 저는 이 과정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가운데 특정한 목표와 소유물, 심지어 관계까지 내려놓는 데 있어서 기념비적인 도움이 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들이 우리 안에서 더 보편화되면 어떨까요?
마가복음 10:17-3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