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예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들으신 소식은 좋은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슬픈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혼자 물러나셨는데, 아마도 애도하고 기도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기에, 예수님이 홀로 배를 타고 가신 것도 그런 까닭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래의 본문 해설에서 다루듯, 네 복음서 모두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혼자 떠나셨다고 기록한 곳은 마태복음뿐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같은 절에서 마태는 무리 역시 이 소식을 “듣고” 걸어서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전합니다. 이 점 또한 다른 세 복음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무리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행한 기적들을 보고 따라왔다고 묘사합니다. 한편, 마태복음의 헬라어 표현은 조금 더 애매해서, 그들이 세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혼자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의 상태가 조금 더 좋은 날에는, 무리가 예수님의 슬픔에 함께하기 위해 따라갔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슬픔으로 상한 마음에 드릴 수 있는 것이 자기들의 ‘함께 있음’뿐이기에 그 마음을 드렸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2007년 영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원제: Lars and the Real Girl)에서 교회 여성들이 바느질거리와 캐서롤 음식을 들고 와서 라스의 슬픔 곁에 함께 “앉아 있어 주는” 장면과 조금 비슷합니다(비록 그 슬픔이 실물 크기의 인형을 향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그 여성들이 말하듯, “비극이 닥치면 사람들이 와서 함께 앉아 있어 주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지역사회 추모 모임에 사람들이 모여 애도하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는 모습으로 생각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을 위한 자리일지라도 말입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서 어떤 자비를 받으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작은 희망이 생깁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선함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자비의 힘이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태가 전하는 이야기 구도 속에서는, 무리가 예수님께 밀려들거나 그분을 압박했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셔서 큰 무리를 바라보시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우리가 이전에도 보았듯이,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치유의 사역으로 그 자비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시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제자들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아마 제자들도 무리와 함께 도착했을 것이고, 사람들이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또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현실적인 접근을 취합니다. 예수님이 꽤 오랜 시간 치유 사역을 이어가시면서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사람들을 돌려보내라고 권합니다(문자 그대로는 “명령”합니다). 저녁때가 되었는데 이곳에는 먹을 것이 전혀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근처에 가게도 없고, 배달 음식도 없고, 푸드트럭도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이 가진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는 성인 남성 열세 명이 먹기에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전에 무리를 보시고 자비를 느끼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그 사명에 참여시키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흥미로운 점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서 기적적인 치유 사역을 행한 경험이 있으면서도, 충분한 저녁 식사를 마련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치유 사역에서 얻은 명성 때문에 그들이 조금 우쭐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이 큰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알고 경험하면서, 눈앞에 있는 더 일상적이고 평범한 “기적”의 가능성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병에서 고침 받는 일은 평생 기억되지만, 배부른 식사는 다음 날이면 다시 뱃속에서 사라지니까요. 오십 년이 지난 뒤에는, 식사 한 끼를 나눠준 사람이나 함께 들판에서 식사했던 수천 명의 사람보다 기적을 행한 사람을 더 잘 기억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기억에 오래 남는 놀라운 기적부터, 일상적이고 쉽게 잊히는 기적까지, 모두 행하십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자신이 그 기적의 일부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방식으로도 기적을 이루십니다. 제자들 외에 그 음식이 어디서 나왔는지 실제로 알고 있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자비는 인정받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반응이나 인정, 보상이 따라야만 한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닙니다. 여기서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자비에는 한계나 요구 조건이 없으며, 자비란 곧 구체적인 방식으로 부어지는 그분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서 물고기와 빵을 받으실 때, 그것은 평범한 재료였지만 예수님에 의해 놀라운 기적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빵과 포도주를 가지시고도 똑같이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받으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나누어 주십니다.
제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던 양이 열두 바구니의 남은 음식이 됩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연관 짓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분명한 ‘열둘’이라는 무리가 있습니다. 바로 배고픈 사람들을 돌려보내자고 했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남은 음식을 거두어들인 뒤, 각자 넘치도록 가득 찬 바구니를 들고 서로를 바라보았을 때,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그들이 거기서 무엇을 깨달았을지, 예수님께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께, 이런 일상적인 기적들에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 포인트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지만, 배경과 세부 상황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마가복음 역시 이 기적을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하지만, 이야기 구조상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의 모습에 더 초점을 둡니다. 누가복음도 비슷하지만, 누가는 사건의 장소가 벳새다라고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시기적 배경이 더해지는데,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고 기록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2014년에 저는 중동으로 스터디 트립을 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요르단에 머무는 동안 느보산 모자이크 상점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표현한 수공예 모자이크 작품을 구매했습니다. 이런 모자이크들은 갈릴리 바다 양쪽의 여러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견됩니다. 일부 유적지들은 대략 주후 300년경에 이 모자이크들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그곳이 바로 이 기적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자이크들의 목적이 그보다 더 보편적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기적이 교회에 영적 의미와 소망을 전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신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의 자비가 물질적 공급으로 나타난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어, 소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진 않았을까요?
마태복음 14:13-2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