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2:1-14 주석

하나님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리실까?

본문의 첫 구절인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라는 문장만으로도 설교 한 편을 통째로 전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의 핵심 주제는 우상숭배,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경배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범하는 죄와 우상숭배의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경우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실망‘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지는 원인도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제시간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까지도 주지 않으시는 경우 말입니다. 카탈로그 페이지를 접어 표시하고 원하는 상품에 동그라미까지 쳤는데도 하나님이 굳이 엉뚱한 것을 보내셨을 때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 상태일 때 하나님보다 다른 무언가를 더 신뢰하고자 하는 유혹을 강하게 받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지요.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필요한 기간 동안 항상 주신다면, 우리는 절박하게 자신만의 계획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모세가 ‘적당한 시간’ 내에 산에서 내려왔다면 백성들은 다르게 행동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적당한 시간이라는 것은 산 위에서 모세와 하나님 사이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땅 위의 백성들이 자의적으로 판단한 기준이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하려 드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요).

로버트 얼터(Robert Alter)는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성향에 관해 이와 유사하면서도 조금 더 긍정적인 해석을 내놓습니다. 얼터는 백성들의 열망이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 그들이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이는 “광야를 통과할 인도자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군사적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광야는 그들처럼 문자 그대로의 사막은 아닐지라도,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그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이 본문을 바탕으로 한 설교는 우리의 완악한 우상숭배 밑바닥에 깔린 이러한 절박한 필요들을 파고듦으로써 지혜로운 목회적 돌봄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교활하다

광야 한복판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는 행위는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입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대부분 자기 집에 이방 우상을 두거나 향이나 초를 피우며 경배하지는 않으므로 이 주제를 보고 일종의 안도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1) 금송아지는 좋은 것들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하나님은 이웃들에게 좋은 물건들을 요구하라고 명령하셨고, 기이하게도 이웃들은 기꺼이 그것들을 내주었습니다 (아이들이 한창 핼러윈 사탕 받기(trick or treating)에 들떠 있을 때 아동부 설교에 활용하기 좋은 연결고리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우상숭배 역시 좋은 것들로,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나 경험, 재력이나 지위 같은 것들로 만들어집니다.

2) 금송아지도 챙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 속의 우상숭배를 진단하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혹은 설교자는 주중의 치열한 삶과 주일 아침 예배의 거룩한 모습을 대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5절에서 아론이 하는 말에 주목해 보십시오.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물론 백성들은 송아지에게 예물과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내러 올 것입니다. 하지만 아론은 이렇게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정말 잘 생각해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이것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가 아니겠느냐?” 알코올 중독이나 일중독처럼 사람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종류의 우상숭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론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 복음과 결탁시킨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보여 주기 식 거룩함이나 외부 사람들을 정죄하는 태도 같은 것들인데, 이것들 역시 결코 죄가 덜하거나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어쩌면 이것들이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잘못된 게 아니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교묘하게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언약 > 우상

7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없는 사이 백성들이 저지른 기가 막힌 짓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9절에서 본문은 다시 한번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라고 말씀합니다. 고대 히브리어에는 따옴표가 없었기 때문에, 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는 표현은 발화의 시작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나서 ‘또’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사이에 모세가 백성들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아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게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이 끝난 후, 대화는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앞서 7절에서 하나님이 백성들을 가리켜 “네 백성(모세의 백성)”이라고 부르신 것에 주목해 보면, 하나님과 모세는 마치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 게임을 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시겠다고 위협하십니다. 모세는 이성적으로 따져 물으며 하나님의 명성에 호소합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후에 이제 와서 이러시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이 재판의 재판장을 진정으로 알고 있었기에, 재판장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논거를 제시합니다. “주의 백성에게 하신 주의 약속을 기억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새로운 길을 여시며, 당신의 백성들과 신실한 사랑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시는 이유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상은 약속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상에게 소원을 빌며 우리의 희망과 기대를 투영할 뿐입니다. 바알은 그 누구에게도 건강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재물은 결코 주가가 폭락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결코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보장할 수 없고, 우리의 명성 또한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든 우상들은 우리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희망을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대롱대롱 매달아 둘 뿐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쉐키나의 영광으로 (이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기 위해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우리에게 임합니다.

예화 아이디어:

이 설교 주석을 준비하면서, 인디 블루그래스 트리오(Indie Bluegrass Trio)인 니켈 크릭(Nickel Creek)의 노래 Reasons Why의 한 구절이 마음속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삶이 왜 뜻대로 풀리지 않는지, 왜 불만족과 수많은 착오, 그리고 엉뚱한 길로 빗나가는 삶 속에 갇혀 있는지 이해하려고 애쓰는 내용인데, 후렴구는 다음과 같이 흘러갑니다. “남들은 핑계를 대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reasons why)가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금송아지가 필요했던 ‘이유’가 모세가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핑계‘라고 판단합니다. 마찬가지로 금송아지 숭배를 “이것 역시 결국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이라며 정당화하려 했던 아론의 시도 또한, 지나고 보면 변명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는 ‘그럴 만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것들은 사실 우리가 남들에게서 쉽게 찾아내던 그 수많은 변명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 비유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진노와 심판을 거두기로 선택하실 때, 그분의 ‘언약’이 곧 하나님의 ‘그럴 만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가슴 벅차고 은혜로운 일일까요!